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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지무(因緣之舞)김묘선 춤 인생 50년 즈음하여
편집실 기사입력  2017/10/22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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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맺어준 인연으로 춤을 추었던 모든 시간들, 그리고 앞으로 걸어야 할 먼 길, 장삼자락 흩뿌리며 마음으로 보은하고 고깔머리 숙여 天命을 다하고 싶다고 발표자는 춤인생 50년을 회상했다.

▲ 최창주비평가협회 평론가     ©월간아라리
그동안 세계 7곳에 27호 승무전수소를 개설하면서 東에 번쩍, 西에 번쩍 세계를 순회하면서 활동하시는 발표자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1부가 시작되기 전에 사회자는 어린 아역배우가 등장하여 깜찍하게 사회를 보는데 공연이 끝날 때까지 관여하였다.

제1부는 大鼓祝祭로 큰 북소리의 3고무인 21명이 우렁차고 테크닉을 갖춘, 그리고 생동감 넘치게 조명의 조작으로 막을 열었다.

삼고무(오고무)로 시작해서, 승무, 기원무, 화선무곡, 초립동 등과 대감놀이는 무당춤을 기본으로 신명의 연희적 요소를 1950년대 이매방선생님의 창작 춤이라고 했다.

제2부는 장사익의 貧賤之交(가난했을 때 사권사람)의 주제로 가창력의 독특한 창법자인 소리꾼으로 2부 막을 열었다. 승무전수조교의 김묘선의 살풀이춤(三生佳約 : 전생, 현생, 후생), 이광수의 亡雲之情의 "빌다" 는 비나리로서 액살을 물리치고 수명장수의 부귀복덕을 비는 덕담과 이어 小鼓祝祭 개인벅구형태의 소고춤을 대삼소삼의 군무로 이어진 프로그램이 휘나레를 장식했다.

이번 작품의 주제가 김묘선춤인생 50주년답게 또 작품답게 다양하게 나열된 옵니버스식으로 끌고 가는 볼거리가 있는 대작품이었지만 주작품은 승무와 살풀이춤이었다.
 지금 Generalist들은 승무, 살품이춤을 민속춤 성격으로 <예술체육의 무용>분야로 구분하려고 한다.
물론 재인청(才人廳)에서 계승된 불교교리 입장으로 불교기원설이라면, 즉, 국교가 불교였다면 ㅡ 체육보다 먼저 상좌, 승무춤으로 정리가 되어 있어야 했는데 오늘날까지도 정리를 못해 주었기 때문에 대학 체육과 속에 무용분야가  그 속에 들어가 있다.

지금도 궁중춤, 민속춤, 의식춤이라고 해야 되는데 궁중무용(가인목단전ㅡ> 처용무), 민속무용(강강술래ㅡ>살풀이춤), 의식무용(나비춤ㅡ>바라춤)으로 구분되어 있다.
 
필자는 강의에서 무용과 춤의 비교와 다른 점을 강의 하고 있듯이, 이제 후대들을 위해 위에 상황들을 소속처에서는 연구해서 정리를 제대로 해야 한다고 사료된다.

우리의 춤은 꾸밈이 없는 생활춤이다. 닫고 밀고, 풀고, 열고 감돌아 들고 풀돌아 든다.
물이 꺼꾸리 올라가지 않듯 자연 원리의 춤으로서 그 발달 과정을 보면 생활춤과 소리로 엮어져 있다.
 
부잣집 생원 생일잔치에 판소리나 승무를 추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듯이, 1905년 원각사 및 협률사, 광무대, 단성사 등의 극장에서 광대들의 출연으로 생활화되어  있으며 발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헌을 살펴 보면 여러가지 승무의 설이 있다. 동자기무설, 황진이와 지족선사, 구운몽이용설, 파계승번뇌표현설 등이 있지만, 당시에 法舞도 있었겠으나, 필자는 중이 속가에 내려와 시주하는 과정에 양반집(宅)에 들어가 보니 아무도 없어 마님을 겁탈했다. 그 마님을 겁탈하는 과정의 장면을 해보라고 광대들에게 양반들이 시연을 지시했을 것이라고 사료된다.
 
그래서 노승과 소매(小梅)의 기원설로 주장하고 싶다, 할 일 없는 양반들은 정자 밑에나 생일날 레크리에이션이 없던 시절, 즐길거리가 없어 이런 놀이를 즐겼을 것이다 그래서 초창기는 중춤인 지금의 탈춤에서 진행된 노장과장의 노장과 소무(小梅)가 對舞의 스토리텔링으로 진행된 것이 더 재미 있게 추어서 발전 진행된 것이 기원설이 아닌가? 추론해보기도 한다.
 
지금이야 완벽한 독무이면서 기녀들의 교방춤이 대학 및 무대공연춤이 되었듯이 교방 및 권번(지금은 사용않고 있지만)의 명칭도 전문가들이 한국식 용어사용도 연구해야 하지 않을까 제안해본다.
 
살풀이 춤 역시 무당들이 神을 접하여 광대(기녀 등)들의 교방예술을 예술적으로 승화되면서 춤이 무용적 무용기법으로 다듬어져 안무가 잘된 아름답게 계승, 전승 발전되어 오고 있다.
더욱 시대가 변화되면서 娛神에서 娛人으로 산업사회가 변화되면서 곱게 단장한 여인의 아름다운 의상(횐 치마, 저고리, 옷고름)과 소품(하얀수건, 비녀, 버선 또는 고무신)을 흔들고 이용하는 춤 추는 자태가 너무나 아름다운 선(線)을 볼 수 있다.
 
지금의 기준은 韓成俊 옹의 춤을 스승들은 전승, 전수를 제대로 받았으면서도 시대가 차차로 변화되면서 후대들은 누구의 춤을 추고 있는지? 독특한 버전의 수법으로 자기 스타일의 연구도 마다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춤의 구성을 어떻할 것인가? 큰 북과 반주 악기는? 장단은? 염불부터ㅡ휘모리까지 이어지면서 손수건보다 큰 수건인 한삼으로, 버선발보다 짚신, 신비로운 조화를 어떻게 관객들에게 보일 것인가?

전체적인 조화가 되어야 하는데 ㅡ 많은 춤꾼들, 무용가들이 고민을 하며 발표준비, 연습을 하면서 어떻게 관객을 만날 것인가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일제시대 때 한국인이 유식한 척하면서 일본언어를 보란듯이 사용하였듯이, ~  러시아의 귀족들도 프랑스의 말을 썼다. 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왜? 우리 러시아를 침범한 프랑스의 말을 쓰느냐? 국민들은 적의 말을 쓴다고 분노했다.
 
비슷한 예는 아니지만, 우리의 한국무용단이 해외공연을 갔을 때, 그 쪽 전문가가 한국공연을 보고 "너희들 것 없어? 왜? 우리 것을 따라하느냐? 너희 것 좀 보여다오?" 비판했을 때, 지도자는 물론 단원들도 쇼크를 받았다.
 
그래서 이제 해외공연 때는 무형문화재의 原形공연을 해야 한다고 원형을 제대로 보여주었을 때, 더 심각한 반대현상이 일어났다.
 
우리의 전통문화공연을 제대로 보여준다고 오리지널로 수준 높게 공연(87년도)을 보여주니 그것도 공연이라고 하느냐? 지루하다고 공연 중에 대통령이 직접 그만하라고 하는 치욕적인 言辭를 들었을 때 ~  우리는 전문가 부족보다

이제 우리 것을 제대로 기획, 제작할 줄 아는 한국의 Generalist와Specialist들은 함께 현장에서 고민하고 동시에 책임감을 가지고 연구,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 예로 85년도 9월 평양대극장에서 남북 문화교류 공연 때 "1부 전통문화와 2부는 2천대를 향해" 의 작품을 공연했을 때, 무대공연은 자신 있다고 한, 북한에서는 깜짝 놀라 두번 다시 남북문화교류를 하자고 제안을 못하고 있다.
최창주 <전 한예종 교수, 비평가협회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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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0/22 [01:45]  최종편집: ⓒ 국악디지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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