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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fact)와 임팩트(impact)의 경계에서
임도건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18/03/20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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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예술신문 칼럼니스트=임도건]MB소환, Metoo폭로, 남·북·미 대화. 어딜 봐도 같은 뉴스의 반복이다. 뉴스에 새로움(news)이 없다. 비슷한 내용에 강도만 세질 뿐 새로운 해법이나 대안 제시는 볼 수 없다. 있는 사실 전달하는 것을 탓할 순 없지만 필요이상의 과열양상을 부추기며 모든 사람을 법적 죄인과 상대적 의인으로 편 가르는 모양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슈가 터지면 무작정 기사화하는 하이에나 저널리즘도 문제고 회의나 출장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펜스룰(pence rule)도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다. 언론의 보도권만큼이나 시청자의 행복추구권도 중요하다. 균형 잡힌 목소리가 나올 법도 한데 여론 분위기상 침묵하는 모양이다. 

사전은 ‘언론’을 신문, 잡지, 방송, 인터넷 등 다양한 대중매체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공적 정보의 일방적인 전달과정으로 정의하는데, 여기엔 부수적인 여론형성까지 포함된다.

문제는 시청(구독)율에 목마른 언론이 사안에 따라 확대 혹은 축소 보도가 다반사라는 점이다. 여론을 반영하는가 하면, 어떨 땐 편승하거나 주도하기도 한다. 특히 파급력이 제일 큰 뉴스는 새로울 것도 없는 소식을 반복하면서 사고의 신축성을 제한하기도 한다.

알랭 드 보통의 저서 [뉴스의 시대: 문학 동네, 2014]에 따르면 뉴스란 지구의 동서남북(North, East, West, South)에서 들려오는 새로운 소식이지만, 그렇다고 시시콜콜한 사건·사고를 다 들을  필요는 없다. 주문하지도 않은 음식을 억지로 먹는 기분이다. 그러다보니 언론도 상품성 있는 소식만 전달하면서 인간사회의 투쟁과 갈등을 심화시킨다. 그것도 심층취재라는 이름으로. 반목과 논쟁의 갈등구조를 확대·재생산해야만 시청률(구독률)이 오르기 때문이다.


정작 독자들의 정신건강은 안중에 없다는 게 문제다. 뉴스에 대한 반응은 크게 네 가지. 짜증, 공포, 분노, 우울이다. 미담이나 훈훈한 선행은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 긁어 부스럼을 내야 사건이 이슈가 되고, 그래야만 언론사의 수익이 생기기 때문이다. 충격을 지속적으로 받으면 면역이 생기듯, 실시간 뉴스를 접하는 독자들은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가십거리로 한탄하면서 자신의 정신건강을 해치고 있다. 무차별적인 특종보도에 시청자의 정신건강은 크게 위협받고 있다.“알” 권리와 “안 볼” 권리의 균형, 이른바 미디어 다이어트도 필요하다.  
 
팩트(Fact)를 앞세워 임팩트(Impact)장사를 하고 공정성을 앞세워 진영논리를 뒷받침하기도 한다. 낱개 뉴스의 전달과정에 특정 프레임도 동시에 확산된다. 과용하면 애초의 복용효과는 사라지고 만다. 언론인 자신들도 이를 모르지 않을 터. 그러나 알면서도 중독된 습관이다. 관점으로 사실을 재단한다. 뻔히 알지만 고쳐지지 않는다. 이렇게 반복된 학습은 불가피하게 남의 ‘신상 털기’나 ‘트집’잡기를 내재화시킨다. 


트럼프가 틸러슨에 이어 맥마스터 보좌관, 켈리 비서실장까지 연쇄 교체했단다. 북미대화에 앞서 강한 대북압박으로 치적을 호도하기 위함이지만 준비기간이 짧은 북한에게 심리적 혼선을 주어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언론 플레이다. 신임 국무장관 폼페이오(CIA국장)가 대북강경론자로 전해지지만 사실은 트럼프 충성자(yes-man)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임면권을 가진 트럼프야 어찌됐건 회담결과가 좋으면 탁월한 결단력이 칭찬받겠지만, 지지부진하면 역풍을 맞을 것이다.

우리에게 뉴스거리가 아니어도 누군가에겐 치열한 생존현장이 있다. 시리아 내전이다. 2011년, 알-아사드 군부정권을 퇴진시키기 위해 시작된 시리아 내전은, 발생 8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25만 명의 감금, 19,000명의 희생자(어린이 4500명 포함)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직접적 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뉴스거리가 되지 못한다. 제천·밀양화재 같은 우리 주변의 참사는 비극이지만, 시리아 사태는 수 만 명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한낱 통계수치로 치부된다.

정작 우리가 시리아에서 태어난 난민 중 하나라면 어쩔 것인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인데 짤막한 단신이나 자정뉴스 자막으로 처리되는 것은 당사자들에겐 비참하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건·사고가 없을 순 없다. 다만 경찰은 조사하고, 검찰은 수사하고, 법원은 공정하게 판결하면 된다. 차분히 자기 임무만 하면 될 일에 필요이상으로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 상대적으로 화해와 용서, 치유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게 안타깝다. 양심적인 고해성사에 진정한 용서가 따를 때 인간존중 문화가 정착될 것이다.

“온전한 사랑이 있는 곳에는 법이 금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사랑과 용서가 법 위에 있다는 말을 되새기는 요즘. 경찰서 100개보다 건전한 교회 10개가 더 바람직하다는 교훈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신호를 준수하며 운전하는데 갓길에서 다른 차가 딱지(?)떼는 걸 보면 괜히 움찔한다. 이를 계기로 사회전반이 정화되고 성숙되길 바란다. 한마디로 “착하게 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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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3/20 [11:10]  최종편집: ⓒ 국악디지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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