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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국악, 무엇이 문제인가(1)
해방 정국에서의 국악의 위상
김갑식 편집국장 기사입력  2020/06/23 [19:07]

[국악디지털신문 김갑식 편집국장] 지난 6월 21일 오후 6시 KBS 1TV에서 방영한 유네스코 가입 70주년 기념 열린음악회의 오프닝 프로그램은 징, 북, 꽹과리, 태평소 등의 흥겨운 농악대와 젊은이들의 역동적이고 발랄한 군무로 많은 시청자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국악의 현주소를 잠시 잊게 만든 싱그럽고 경쾌한 모습이었다.
 
국악의 현주소라는 표현을 썼는데 실제로 오늘날 우리의 국악은 다른 예술장르와 비교할 때 몸살을 앓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중환자실에 몸져 누워 있는 형국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같은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1차적 책임은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해당 부처가 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보다 심층적이고 체계적인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정책 개발과 예산 집행에서 낙제점을 받고 있다는 것이 국악계 안팍의 공통된 시각이고 지적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책임은 놀랍게도 국악인이라는 게 역시 국악계 안팎의 준엄한 판단이다. 300만을 헤아리는 국악인들 가운데 정작 국악전공인들 당사자보다는 국악의 저변을 넓혀온 국악애호가들이 단연 국악의 수호자 역할을 해왔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마지막 세 번째 책임은 각종 국악단체에 간여해 온, 영혼이 아니라 무늬만 국악인들인 사람들에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5천년 역사를 이어오며 우리 한민족의 희로애락과 함께 한 우리의 전통음악인 국악이 변방으로 밀려나 깊은 상처를 입은 것은 한 세기 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는 한일합방 이듬해인 1911년부터 해방되던 1945년까지 음악교육 정책을 실시했는데 서양음악과 서양기법으로 작곡된 일본식 창가로 국한시켰다. 이때부터 음악 하면 자연스레 서양음악만을 가리키게 된 연유이다.
 
해방 직전까지 존재했던 조선음악가협회는 해방 직후 생긴 조선음악건설본부라는 이름의 단체로 바톤 체인지가 이루어진 셈이지만 해방 정국에서 이념의 충돌 끝에 진보적 음악가들은 조선음악건설본부에 참여를 거부하고 ‘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을 만들었다. 이들은 9월 30일에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연맹’의 일원이 된다.
 
당시 조선음악건설본부 산하에는 국악위원회, 성악부, 기악부, 작곡부 이렇게 4개 부서가 있었다. 국악 부문이 맨 앞에 나오고 위원회급이라 다른 부서보다 중량감이 있었다. 이처럼 해방 직후에는 국악의 위상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국악위원회는 국악건설본부, 국악회라는 명칭을 거쳐 1945년 10월 10일 국악원으로 정해진다.

김갑식 편집국장 gugakpeople@gugakpeop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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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김갑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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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6/23 [19:07]  최종편집: ⓒ 국악디지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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