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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금전도 소리보다 못하더라”
박록주 - 영남판소리의 출발점에 서 있는 거목(1)
정정미 영남판소리보존회 이사장 기사입력  2020/08/30 [20:04]

 

<삼대 여류 명창대회.

금수강산이 낳은 삼대 여류 명창회.

가곡계의 우이(牛耳)를 잡는 박월정(朴月庭), 박록주(朴綠珠), 김초향(金楚香).

 

조선음률협회 후원회 주최와 본사 개성지국 후원 하에 24일 오후 7시부터 부내 서목정(西木町) 개성좌(開城座)에서 박월정, 박록주, 김초향 3인 공연을 개최하는데 당일 상연할 곡목은 조선재래유명가곡 20여 종이다. 이 조선여류명창대회는 개성 초유의 공연을 각 방면으로 인기를 집중하고 있으므로 성황을 예상한다.>

 

1931924일 자 매일신보에 실린 기사이다. 이 날 개성 공연장에서 세 여류명창은 분명 관객의 큰 박수갈채를 받았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국악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나라 잃은 설움에 우리 고유 문화에 대한 애정이 더해졌을 테니 당연한 일이 아니었겠나.

 

이 무렵 명창들은 전국 각지를 다니며 판소리를 했는데 그 중 인기가 높았던 사람이 바로 박록주였다.

 

요즘 판소리 하면 호남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일제시대 때는 달랐다. 1920년대부터 20여년간 영남은 판소리의 고장이었다. 박녹주는 영남 출신의 선배 김추월(金秋月:18961933), 김록주(金綠珠:18971932), 이화중선(李花中仙:18981943), 김초향(金楚香:19001983), 권금주(權錦珠:19031971) 그리고 후배였던 이소향(李素 香:19051989), 신금홍(申錦紅:19061942), 신숙(愼淑:19161982), 오비취(吳 翡翠:19181982), 임소향(林素香), 박귀희(朴貴嬉:19211993), 박초향(朴楚香:1 9231964) 등과 함께 달구벌을 판소리의 중심지로 만든 주역이었다.

 

박록주는 1905125일 경북 선산군 고아면 관심리 437에서 부친 박중근, 모친 권순이 슬하 31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본명은 명이(命伊), 아호는 춘미(春眉), 예명은 녹주(錄珠)이다. 부친은 가장으로서 집안은 돌보지 않고 술과 노름을 즐기던 한량으로 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때문에 박록주는 어린 시절부터 모친을 도와 농사일은 물론이고 허드렛일까지 하며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     © 선임기자김태민

부친 따라 경상도 곳곳 누비던 새끼명창

 

그러던 중 12살 때인 1916년 전국을 돌며 판소리, 춤 등을 공연하던 협률사라는 예술단체가 선산에 와서 공연을 했는데 부친이 다녀와서는 박록주에게 대뜸 판소리 공부를 권했다. 부친은 평소 딸의 목소리가 힘이 있고 우렁차서 소리를 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박록주는 부친의 손에 이끌려 당시 명창으로 소문난 박기홍한테 소리를 배우게 된다. 부친은 딸에게 명창이 되라는 뜻으로 녹주(錄珠)라는 새 이름을 지어 주었다.

소리공부는 뜻밖에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박록주까지 네 명의 제자들은 밥먹고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하주 종일 목청을 높여가며 소리를 배웠다. 박기홍은 소리 할 때의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사소한 부분도 매우 엄하게 가르쳤다. 더구나 소리의 내용인 사설은 대부분 한문 투로 되어 있어서 외우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끼니 때마다 소리공부에 좋다는 참기름을 몇 숟가락씩 따라 먹었지만 밤낮없는 연습으로 목에서는 피가 넘어오기 일쑤였다. 공부가 힘들고 벅찼지만 어린 마음에도 박록주는 차츰 판소리가 몸속으로 들어와 조금씩이나마나 자리를 잡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힘겨운 하루하루가 지나는 사이 하나씩 제자들이 떠나고 어느 날 박록주만 달랑 남게 되었다. 박기홍은 박록주만을 상대로 공부를 시킬 수가 없어 집으로 돌려보낸다.

 

의기소침해져 돌아온 박록주에게 소리를 시킨 부친은 반색을 하며 장차 명창이 될 거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는 마을사람들에게 무슨 경사스런 일이 생기면 박록주를 데리고 가서 소리를 하게 했다. ‘새끼 명창이라는 별명까지 붙게 되면서 박록주는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곳곳을 다녔다.

 

14살 되던 1918년 김창환에게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를 배우면서 박록주는 나름대로 판소리의 깊음과 높음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한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박록주제 제비노정기는 소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치는 흥보가의 백미이다.

 

1921년 원산에서 열린 명창대회는 17살 박록주를 한 단계 상승시킨 전기였다. 소녀답지 않은 힘차고 맑은 성량은 차츰 박록주에게서 새끼명창이라는 별칭을 사라지게 한다. 1923년 송만갑에게서 춘향가, 적벽가, 3년 뒤 김창환에게서 흥보가, 적벽가를 배운 22살의 박록주는 마침내 처음으로 음반을 녹음했다. 1929년부터 2년 사이 콜럼비아 레코드, 오케이 레코드, 빅타 레코드 등 여러 음반회사에서 음반을 녹음했을 만큼 인기가 날로 치솟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듯 겉으로는 화려한 명성이 따라다녔지만 속으로는 말못할 괴로움이 박록주를 옥죄고 있었다.

 

19293월의 어느 날 송만갑의 수제자인 김정문에게 흥보가를 배우고 돌아온 뒤였다. 금전에만 골몰하며 자신을 난처하게 만드는 부친에 대한 원망 등 여러 가지 고민을 하다 박록주는 극단적인 생각으로 많은 양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한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이 사건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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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8/30 [20:04]  최종편집: ⓒ 국악디지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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