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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금전도 소리보다 못하더라”
박록주 - 영남판소리의 출발점에 서 있는 거목(2)
정정미 영남판소리보존회 이사장 기사입력  2020/08/30 [20:50]


폭풍처럼 몰아닥친 소설가 김유정의 사랑

 

사랑만큼 불가해하고 예측불허의 테마도 없을 것이다. 사랑은 연관된 사람들을 황홀경에 빠지게 하거나 폭풍우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하며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박록주에게도 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돌풍이 몰아쳐 한동안 불안과 고통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했다.

1928년 봄 서울에서 명창대회에 참가하는 등 몹시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박록주에게 한 젊은이가 행사장으로 찾아왔다. 소설을 쓰던 김유정이었다. 박록주를 만나자마자 사랑의 열병을 앓기 시작한 이 소설가는 요즘 말로 스토커가 되어 박록주를 괴롭혔다.

 

박록주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김유정이 귀찮고 나중에는 두렵기까지 했다. 그도그럴것이 행사를 앞두고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 바쁜 때인데도 불쑥 나타나 아예 앞을 가로막고 협박까지 한 것이다.

 

<김유정이 나를 부른 칭호도 금새 달라져 갔다. 처음에 선생이라고 하더니 당신이라고 변했고 나중에는 라고 자기 부인을 칭하듯이 불렀다. 하루는 인력거를 타고 돌아오는데 검은 그림자가 인력거를 향해 돌진해 왔다. 직감적으로 김유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인력거꾼에게 정거하지 말고 빨리 앞으로 달려가라고 소리쳤다. 김유정은 번쩍이는 뭔가를 손에 들고 있었다. ‘칼이다하는 생각이 들자 온몸이 오싹해졌다. 인력거꾼은 재빠르게 앞으로 달려갔으나 김유정이 더 빨랐다. 그는 인력거채를 움켜잡고 나에게 소리쳤다.

 

녹주, 오늘 밤은 너를 죽이지 않으마. 안심하고 내려라.” 그가 들고 있던 것은 하얀 몽둥이었다. 그는 자기 얼굴을 내 얼굴 가까이 들이대더니 불뿜는 듯한 눈초리로 노려보면서 물었다. “너는 혹 내가 돈이 없는 학생이기 때문에 나를 피하는 거지?” 나로서는 너무나 의외의 질문이었다. 잘못 대답하면 내가 돈에 의해 좌우되는 천한 여자가 될 것만 같았다.>

-박록주가 한국일보에 연재한 나의 이력서에서

 

2년 여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하던 김유정은 1930년 여름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로 내려간다. 그리고 폐결핵과 늑막염으로 숨진 1937년 봄까지 아이들을 가르치며 30여 편의 단편소설을 썼다. 이 가운데생의 반려두꺼비는 박록주와의 일방적 관계를 소재삼은 것이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김유정의 짝사랑은 이렇듯 문학의 형태로 남아 있다.

 

 

▲     ©선임기자김태민

송만갑, 이동백 등과 함께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를 결성, 창극공연을 기획한 박록주는 1935년부터 4년 간 동양극장에서 공연된 창극 춘향가에서 주인공 춘향 역을 맡아 최고의 인기를 누린다.

 

1948년에 여성국악동호회를 창립한 박록주는 6.25 전쟁중 일선 군인들을 위문하러 다니다 오른쪽 눈을 다쳐 이후부터 색안경을 썼다.

박록주는 1965년 김여란, 김연수, 김소희, 정광수, 박초월과 함께 춘향가로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다. 또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대상이 판소리 다섯마당으로 늘어나면서 흥보가의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소리는 땅에 남기고 몸은 하늘로

 

제자들이 모여 1966년 연 발표회는 박록주를 몹시 기쁘게 했다. 19691015일 명동 국립극장에서 가진 은퇴공연 뒤에도 판소리보존연구회를 만들어 제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김소희, 한애순, 박귀희, 성우향, 조상현, 박초선, 성창순, 이옥천, 한농선, 박송희, 정성숙, 조순애, 정의진 등이 박록주의 제자로 이름을 올렸고

 

박녹주에게 흥보가를 사사한 김소희가 대구의 이명희에게 흥보가를 사사하며 영남판소리의 맥을 고스란히 이어가고 있다.

 

<젊어 청춘 좋은 그때 엊그젠 줄 알았더니, 오늘 보니 늙었구나. 검던 머리 희어지고 곱던 형용 변하야 우주가관 들었으니, 웬수야, 웬수가 따로 없고 백발이 웬수로구나...>

 

1978년 병든 몸으로 고향 선산으로 내려온 박록주는 고별 무대에서 단가 백발가를 불렀다. 굴곡 심했던 자신의 삶을 그대로 노래하듯 하자 객석은 온통 울음바다였다.

 

이듬해 1979526, 75세의 박록주는 서울 면목동 변두리의 한 단칸 셋방에서 격동과 영욕의 세월을 뒤로 하고 쓸쓸히 이승의 삶을 마감한다. 양아들로 맞아들인 조상현이 임종을 지켰다.

 

구미시 선산읍 노상리 마을회관 앞 놀이터에는 장구와 북을 깔고 앉은 박록주의 기념비가 있다. 1981년에 세워진 이 기념비 앞에서 제자들은 기일인 526일이 돌아오면 판소리한마당을 펼치곤했다. 또한 구미문화연구회 등이 주축이 된 추모사업회는 대구 이명희 명창과 함께 2001년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명창 박록주전국국악대전을 개최해 오고 있다.

 

영남판소리의 출발점에 서 있는 명창 박록주, 그리고 그의 제자 국창 김소희,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이명희 명창. 그들은 곁에 없지만 영남판소리보존회 이사장 정정미(대구시무형문화재 제8호 판소리 전수조교)가 당대 명창들의 예술적 정신이 담겨 있는 유지를 받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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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8/30 [20:50]  최종편집: ⓒ 국악디지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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