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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영원한 소리 아리랑
(2)아리랑의 어원을 찾아서 - 그 기나긴 항해의 첫걸음
김갑식 편집국장 기사입력  2020/10/02 [22:40]

 

[국악예술신문=김갑식 편집국장] 아리랑의 어원(語源)을 찾는 일은 사실 망망대해에서 목표로 하는 작은 섬 하나를 찾는 일만큼이나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그동안 수많은 분들이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 남겨놓은 궤적이 적지않아 도움이 되겠지만 오히려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킬 수도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 이제부터 필자는 초행길을 떠나는 나그네 심정으로 돛단배에 올라 저 드넓은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싸이지

잠시 잠깐 님 그리워서 나는 못 살겠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정선아리랑. 아우라지 나루를 사이에 두고 양편에 정겹게 들어선 두 마을, 여량리와 송천리의 처녀 총각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

 

여량리 처녀는 날마다 싸리골 동백을 따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송천리로 징검다리를 건너가 총각을 만났다.

 

그러다 여름 장마로 홍수가 져 물을 못 건너 총각을 만날 수 없자 처녀가 안타까움을 하소연하는 노래를 지어 부른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처녀는 싸릿골에 있는 동백 열매를 빨리 따 짜내어 머릿기름을 머리에 바르고 싶었을 것이다. 님에게 더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기만 한데 궂은 날씨는 더욱 조바심을 나게 한다.

 

더욱이 폭우에 동백 열매라도 떨어지면 머릿기름은 구경조차 못할 게 뻔하니 처녀의 마음은 애가 타 견딜 수가 없다.

 

▲ 정선 아우라지 처녀상    © 선임기자 김태민


필자는
20여 년 전 어느 가을날 늦은 오후 이 아우라지 나루를 찾아, 언젠가 나루를 건너올 님을 그리워하며 하염없이 그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처녀상에게 하마터면 말을 건넬 뻔했다.

 

아마 취기 때문이었으리라. 낮에 그곳 주민들과 주고받은 농주는 나그네의 가슴을 아라리 자락에 휘감기게 했다. 해는 이미 기울어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필자는 그 처녀가 어둠 속에 휩싸이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무슨 의무감이라도 있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 자리를 쉽사리 떠나지 못했다.

 

이제 그 처녀는 마흔 고개를 앞둔 아낙이 되어 있을까.

 

정선은 아리랑의 본향(?)

우리나라에서 아리랑을 그 지역 정서로 가장 많이 활용하는 곳은 단연 정선이 으뜸일 것이다. 정선은 아리랑의 발상지 가운데 한 곳으로 정선아리랑은 고려 말부터 불려왔다고 전해진다.

 

고려조가 망하던 시기에 불사이군의 충의를 지키기 위하여 정선에 낙향한 선비들이 부른 노래로 출발했다는 주장이다.

 

조선이 개국한 뒤 태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고려의 대표적인 신하는 72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김위, 전오륜, 김충한, 고천우, 이수생, 신안, 변귀수 등 일곱 신하는 벼슬을 버리고 개성에서 정선 남면 낙동리로 들어와 산나물을 뜯어 먹으며 죽을 때까지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켰다고 전해진다.

 

그들이 살던 동네가 지금의 정선군 남면 거칠현동(居七賢洞)이다. 이들은 지난날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을 맹세하며 입지 시절의 회상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한시로 지어 율창(律唱)으로 부르곤 했다.

 

이들이 지어 비통한 심정을 담아 부르던 시가 마을 사람들이 부르던 소리 가락에 실려 애절함을 더해 갔다는 것이다.

 

그 뒤 정선 사람들이 산간 오지에서 뗏목을 타고 한강 지류를 통해 한양까지 오는 동안 자연 아리랑이 전해지면서 일종의 플랫폼 역할을 한 한양에서 전국 각지로 전파되어 다른 아리랑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한마디로 아리랑의 본향(本鄕)이 바로 정선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를 반박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정선아리랑의 가사가 탄식과 설움에 겨운 게 많고 가락도 구슬프고 구성진 곡조인 데 반해 다른 지역의 아리랑은 가사 내용과 곡조, 장단이 완전 다르고 다만 후렴만 비슷할 뿐이라는 반론이다.

 

정선아리랑은 197110월 제11회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1971년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다.

 

그러나 이 무렵 정선아리랑을 정선아라리로 불러야 한다는, 명칭에 대한 이견들이 있었다. 아리랑에 대한 일종의 우월적 위상을 차지해야 한다는 지역 정서도 작용했을 것이다.

 

사실 이전부터 주민들 사이에서는 정선아라리, 아라리, 아라리타령으로 부르곤 했었다. 아라리는 누가 내 뜻을 알리요라는 말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오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정선군에서는 공식 명칭을 정선아리랑으로 정했다.

 

정선아리랑은 비기능요(非機能謠)에 속하나 모찌기와 모심기, 그리고 논밭을 맬 때 두레판의 노동요의 구실도 한다.

 

아라리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가장 늘어지게 부르는 긴 아라리, 이보다 경쾌하게 부르는 자진 아라리, 앞부분을 긴 사설로 엮어 나가다가 나중에 늘어지게 부르는, 곧 아라리의 가락으로 되돌아가는 엮음 아라리가 있다. 엮음 아라리는 긴 아라리에 대한 변주로 부수적인 성격을 띈다.

 

정선아라리는 늘어지는 긴 아라리를 가리키며, 강원도 전역에서 불려온 세 가지 아라리 중 가장 많이 활발하게 불린다.

 

순서는 일정하지 않으나 장단이 느린 아라리인 긴 아라리를 먼저 부른 다음 빠른 가락의 엮음 아라리를 부른다.

 

가사 내용은 남녀의 사랑, 이별, 신세 한탄, 시대상, 세태 풍자 등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다. 또 정선에 있는 지명이 자주 등장하여 지역적 특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가사 형식은 21연의 장절형식(章節形式)에 후렴이 붙어 있다.

 

아리랑의 어원설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많은 학자, 연구가들이 이 매력적인 한민족의 소리 아리랑의 어원을 규명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대체 아리랑이라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 마치 은방울, 혹은 새벽 이슬처럼 동글동글한, 또 귀여운 아기가 방긋 웃는 모습을 떠올리는 이 아리랑이라는 말은 어디서 온 것이란 말인가.

 

아리랑 연구에 각별한 애정을 기울이고 있는 아리랑 원형연구의 저자 조용호 박사는 최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아리랑에 대한 학문적 접근은 19세기 말 조선을 찾은 외국인들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아리랑은 어떻게 발견되었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 연구가 진행되고 있나? 근대 개화기인 19세기 말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 중에서 헬버트(Homer Bezaleel Hulbert), 시노부 쥰페이(信夫淳平), 와다텐민(和田天民), 이치야마 모리오(市山盛雄) 등은 매우 특별한 노래로서의 아리랑을 발견하고 기록을 남겼다.

 

내국인에 의한 연구는 최영년, 최남선, 이광수, 김소운 등이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민요 연구로서의 아리랑이 학술적 논의의 대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가 된 것은 김지연의 아리랑 발생설'인데, 김재철, 김태준 등의 언급과 인용을 거치면서 아리랑 연구의 중심설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1945년의 해방과 19506.25 동란 등 민족적 변혁기를 거치면서 일본, 미국, 중국 등을 포함하여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매스컴을 통해 민간에 확대되기도 하였다.

 

또한 인접 학문과의 교섭 측면에서 이병도, 양덕동, 심재덕 등에 의해 학술적 논의가 재개되었으며, 이후에 임동권, 정익섭 등 다양한 주장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리랑의 뜻조차 밝히지 못하게 됨으로써 뜻없는 후렴구의 노래이고, 발생 시기는 영화에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생각으로 고착되기도 하였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은 기록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황현, 임동권, 어영(), 고권삼, 님 웨일즈, 메리 테일러 등의 기록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록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 학술적 범주에서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거나 배제된 상태에 있었다.

 

그간의 노력과 연구를 바탕으로 아리랑의 본질과 입체적 모습에 대하여 정립하게 되었다.>

 

조용호 박사는 컴퓨터 암호학을 전공한 후 20028월 국어국문학, 중국어 음운학, 고어 한어, 일본어 고어 등을 통해 아리랑 노랫말이 4구체 향가의 변용이면서 동시에 진화된 의사향찰 표기 체제임을 알아내어 학계에 제시했다.

 

그는 처음으로 현존하는 한국 고대시가에 음()과 훈()으로 문장을 표현하는 체계가 존재함을 밝힘으로써, 한민족의 인문학적 독창성과 존엄성은 물론이고 향가 존재의 당위성을 증명한 것이다.

 

조용호 박사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아리랑은 단순한 노래, 그 자체만이 아니라 아리랑 속에는 광개토대왕릉 비문이 담겨 있고, 신라 향찰이 담겨 있고, 고려사가 담겨 있으며, 5천년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다고 주장한다.(계속)

 

국악예술신문 김갑식 편집국장 gugakpeople@gugakpeop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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