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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 명창 / 하늘로 올라간 경기민요의 마지막 트로이카 이은주 명창
" 청아하고도 명료한 성음은 경기민요의 진수를 담아내기 안성맞춤이었다" _ 한명희
김갑식 편집국장 기사입력  2020/11/05 [18:33]

 

[국악예술신문=김갑식 편집국장]우연히 저 달이 구름 밖에 나더니 공연한 심리를 더욱 산란케 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로구료 아리랑 아리얼쑤 아라리로구료

                                                                                      - 경기민요 긴아리랑

 

 

아리랑 자락을 부여잡고 쉼없이 달려온 이은주 명창이 한 세기를 불과 두 해 앞두고 11월 2일 98세를 일기로 손을 놓았다. 이은주, 그 이름만으로도 여전한 이팔 청춘의 아름다움과 싱그러움을 남긴 채.

 

이제 경기민요는 먼저 타계한 안비취(1997), 묵계월(2014) 명창에 이어 마지막 이은주 명창까지 ‘1세대 트로이카를 역사의 갈피 속으로 보내드린 셈이다.

 

이은주는 1922년 지금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장항동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된, 경기도 양주군 장항면 삼상리에서 아버지 이덕삼과 어머니 홍순원 슬하 맏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민요 부르기에 관심이 많았던 이은주는 철이 들자 부모님에게 소리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을 꺼낸다.

 

양주의 부농이었던 아버지는 여자애가 시집이나 잘 가면 되지 무슨 소리냐며 반대했지만 어머니는 그 말을 가슴에 담아 어느 날 너 하고 싶은 일 꼭 하라며 남편 몰래 딸을 서울의 명창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불과 열셋 나이에 명창 원경태에게 사사하며 민요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원경태는 첫날 눈을 지그시 감고 이 어린 제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곰방대를 탁탁 털더니 앞으로 너를 은주(銀珠)라고 부르겠다며 본명인 윤란(潤蘭)을 지우게 했다.

 

▲ 이은주, 그 이름만으로도 여전한 이팔 청춘의 아름다움과 싱그러움을 남긴 채 하늘로 올라간 경기민요의 마지막 '1세대 트로이카'     © 선임기자 김태민

 스승은 은주의 목소리가 은방울 구르는 듯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은방울은 바로 이튿날부터 호되게 굴러야 했다.

 

처음에는 회초리가 하나였지만 날이 갈수록 두 개, 세 개가 겹쳐지며 종아리에 휘감기는 실뱀의 굵기가 달라졌다. 은방울은 목에서 구르지 않고 차츰 눈 속에서 물방울이 되어 쉼없이 굴러나왔다.

 

이렇게 5년간 스승의 입에서 나온 경·서도소리, 가사, 시조, 잡가가 은주의 목에서 다시 나와 스승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이은주는 스승의 뜻에 따라 1939년 인천 흥명극장에서 열린 팔도명창대회에서 평안도 민요 수심가를 불러 장원을 차지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해 경성방송국 출연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국악활동을 한다. 부모님은 방송일 하는 것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제 장원까지 했으면 소원성취했으니 시집이나 갈 일이지 그런 데로 나댈 필요까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은주는 이미 자신도 모르게 스타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스타 탄생은 주변에서부터 전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녹음방송 시스템이 없던 시절이라 어떤 날은 하루에 다섯 차례나 방송국에 불려나갈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대동아전쟁 발발 후 국악활동이 위축되자 194322살 때 친구 소개로 결혼한 이은주는 1945년 해방 직후 국악원 민요부원으로 가입했다. KBS의 전신인 서울중앙방송국 전속 민요부원으로도 활동했다.

 

12녀를 둔 어머니로 생계를 위해 종로에 음식점 동명관을 개업하기도 했다. 1947년에는 경기창극 견우직녀주인공으로 뽑혀 이틀 동안 단성사에서 공연했고, 고려레코드사의 민요 음반제작에도 참여, 해방 후 첫 국악음반인 아리랑’ ‘베틀가등을 녹음하기도 했다.

 

6.25가 발발하자 대구에서 방물장사 떡장사 등을 하며 피난살이를 했는데 이 시절의 고단한 삶은 태평가에 녹아 있다.

 

태평가1930년대 유행했던 선우일선의 신민요인 태평연가사를 다듬고 후렴구를 생략하여 편곡한 민요로 국악애호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이은주의 재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히트곡이었다.

 

휴전 뒤 1954년 유니버셜레코드사 전속가수로 캐스팅되면서 많은 민요를 유성기 음반에 녹음했다. 그밖에도 킹스타 신세기 등에서도 녹음하였는데, SP음반만 해도 킹스타레코드사 37,

 

고려레코드사 3, 신세기레코드사 15, 도미도레코드사 11, 유니버셜레코드사 13, 오아시스레코드사 9매 등 90매에 이르고 있지만 실제로는 1백 매가 넘을 것으로 짐작된다.

 

1955년 단성사에서 개최된 명창대회에서 경기잡가 유산가1등을 차지한 이은주는 1957년부터 이창배가 설립한 청구고전성악학원 경기민요 강사로 있으면서 많은 제자를 키웠다

 

1960, 1961년 두 해 동안 원각사에서 열린 청구고전성악학원의 이창배문하생발표회때는 제자 동료들과 함께 공연, 잡가와 민요를 불렀다.

 

이 해에 이소향, 안비취와 함께 한국민요연구회를 설립, 초대이사 및 부회장으로 위촉되었다. 1963년에는 민간단체로는 가장 큰 규모의 공연단인 한국민요연구회 공연단 일원으로, 일본에서 23개 도시를 순회하는 재일교포 위문공연을 한 달여 펼쳤다.

 

1966년 한국일보가 후원한 중요무형문화재 종목발표회 경기민요 공연에 이진홍, 묵계월, 김옥심과 함께 출연했으며 1967년에는 서울 종로 2가에 찻집 마야미를 개업, 사업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1969년 동양방송이 주최한 TBC 4회 명인명창대회에서 긴잡가를 불러 대상을 수상한 이은주는 같은해 12잡가가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예고되면서 경기민요 보유자 후보로 인정되었다.

 

마침내 197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보유자로 인정받은 직후 이은주경기창연구원을 개원하여 제자를 양성했다. 제자양성 공로로 이은주는 1991KBS 국악대상 민요부문 특별공로상을 수상한다.

 

1991년에는 호암아트홀에서 고희기념 바람 한자락 소리 한자락공연을 했으며 1993년에 국악진흥 및 발전공로를 인정받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019월 국립극장에서 팔순 기념 경기민요발표회를 가졌다. 당시 서도소리꾼인 이문주가 작사 작곡한 할렐루야 상사디야 인생가'가 큰 박수를 받기도 했다.

 

2006년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이은주의 소리입문 70년을 기념하는 소리연공연이 있었는데, 이때 제자와 문하생 170여 명을 비롯해 연주자와 무용가들까지 2백여명이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같은 해 방일영 국악대상을 수상한다.

 

200988세 축하 미수공연 때에는 김문성 작품의 소리극 은주 이야기를 무대에 올려 지나온 민요 인생을 들려주었다.

 

한명희 전국립국악원장은 이은주를 가리켜 “20세기 후반의 민요계를 선도해온 뛰어난 명창이다. 특히 청아하고도 명료한 성음은 경기민요의 진수를 담아내기 안성맞춤이었고 단정하고 세련된 가창력은 만인의 감성을 자신의 의중대로 휘어잡기에 충분했다고 평가했었다.

 

고인의 제자들인 김금숙, 장순, 한진자김점순, 이선영, 노경미, 유옥선 명창 등이 스승 이은주 명창의 뒤를 이어 경기민요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그대로 이어나갈 게 틀림없을 것이다.

 

이은주 명창이시여, 경기민요의 품속에서 영면하시라!

 

 

경기민요

 

경기민요(京畿民謠)는 서울과 경기도, 충청 북부의 일부 지역과 강원 지방의 일부 민요들도 포함하고 있어 중부지방 민요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는 토속민요와 이를 근간으로 전문적인 예능인이 윤색하여 창작한 통속민요가 있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경기민요는 '경기좌창'이라 일컫는 '경기긴잡가'이다. 잡가는 가곡이나 가사와 같은 정가(正歌)와 비교되는 속가(俗歌)라는 뜻으로 쓰였으나, 요즘에는 속가 중에서도 긴형식의 노래를 앉아서 부르는 것을 잡가라 부른다.

 

경기잡가 가운데 느린 장단으로 된 12잡가를 긴잡가라 하는데 유산가, 적벽가, 제비가, 소춘향가, 선유가, 집장가, 형장가, 평양가, 십장가, 출인가, 방물가, 달거리 등이다.

 

유산가는 산천경치를 노래한 것이고, 소춘향가, 집장가, 십장가, 형장가는 판소리 춘향가의 내용으로 사설을 만든 것이다. 적벽가는 판소리 적벽가와 비슷하고 제비가는 판소리 흥보가와 내용이 같지만 판소리 곡조로 된 것은 아니고 일부 사설만 썼을 뿐이다.

 

 

▲ TV에 나와 경기민요 긴아리랑을 열창하는 이은주 명창.    


평양가
, 출인가, 방물가, 달거리는 서민적인 삶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정이나 사랑 등 보편적인 정서를 노래하고 있다. 장단은 흔히 느린 6박 도드리장단이나 좀 느린 3박 세마치장단으로 된 경우가 적지 않다.

 

선율은 서도소리제인 수심가토리와 경기소리제인 경토리가 뒤섞인 특이한 음조로 이루어져 있다.

 

경기긴잡가의 특징은 경기 특유의 율조로서 서경적 또는 서정적인 긴사설로 비교적 고요하고 은근하며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서정적인 표현이 대부분이다.

 

경기잡가는 조선시대 서울 장안의 소시민들이 모였던 공청또는 깊은사랑을 통해 12잡가가 태동하였으므로 공청소리문화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은주 육성 채록

<19711212, ‘추억의 스타 앨범라디오 방송>

 

 

"그러니까 열일곱 살 때였나? 인천 그 쪽에 흥명극장이라고 있었어요. 그 극장에서 명창대회가 열려 노래하는 분들하고 각자 팬들이 많이 모였지요.

 

나는 스승님 뜻에 따라 처음 갔으니까 나라는 사람을 아직 모르지만, 내 나이가 원체 어리고 그래서 노래를 부른다 하니까 한번 좀 만나봐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오신 분들도 많았던 것 같아요.

 

그때 제일 놀란 것이 뭐냐 하면, 그 전에는 그렇게 하고 돌아다니는지 몰랐어요. 인력거를 타고 앞에서 노란 옷들을 전부 입고 꿍꽝 꿍꽝 북을 쳐가면서 소라도 불면서 앞에서, 말하자면 지휘자가 그렇게 하면서 가면 뒤에서 전부 따라 그렇게 가더군요.

 

지금도 키가 작지만, 그때는 나이도 어리고 키도 작았기 때문에 그 인력거를 타고 시내, 마을을 전부 돌아다니니까 저 꼬맹이가 뭘 하겠다고 돌아다니나 하며 전부 손가락질을 하고 껄껄대고 웃어요. 그래서 나는 내 나이가 어려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지요.

 

지금 같으면 부끄러워서라도 못하겠지만 그때는 그냥 그렇게 인천 시내를 인력거 타고 얼굴에다 안갱이칠을 해가면서 돌아다녔어요.

 

그렇게 돈 뒤 다시 극장에 들어가게 됐는데, 나는 그때 우리 부모님이 시골에 계셔서 극장에 쫓아오시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부모들이 쫓아와서는 12등을 다투는 데 응원을 하는 거지요.

 

나는 아무도 안 왔지만 나이가 어리고 노래 잘 하고 목소리도 좋다고 해서 오게 된 건데. 내가 일행에게 뭘 불러야 하느냐고 물으니 수심가를 하라 그래요. 수심가를 부르면 틀림없이 1등이 될 테니까 하라고.

 

그래서 나같이 어린 사람이 무슨 수심가를 하느냐니까 그러지 말고 부르라고 하도 재촉해서 할 수 없이 하게 됐어요. 다 부르고 나니까 박수소리와 환호소리가 굉장했었지요.

 

덩치도 쬐끔한 여자아이가 어떻게 저렇게 목소리가 좋으냐고 말이에요. 나도 그땐 나이가 어리니까 그저 박수 받는 거만 좋아서, 사람들이 내가 부르는 민요 듣고 껄껄 대고 좋아라 하면 나도 그냥 신나서 부른 거예요."

 

국악예술신문 김갑식 편집국장 gugakpeople@gugakpeop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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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김갑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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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1/05 [18:33]  최종편집: ⓒ 국악디지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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